행동경제학

행동경제학적으로 본 디지털 유산관리의 불안심리의 구조

moncherhee 2025. 7. 9. 09:15

  2025년, 국내 주요 플랫폼들이 '디지털 유산 관리 서비스'를 속속 도입하고 있다. 네이버는 최근 '사망 시 계정 자동 폐쇄' 기능을 추가했고, 카카오도 '지정한 유족이 자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시스템'을 준비 중이다. 애플과 구글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디지털 상속' 기능을 운영해왔다. 이제는 소셜미디어, 이메일, 클라우드에 남겨진 정보들이 물리적 재산 못지않게 중요한 자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서비스가 있다는 걸 알고도, 실제로 설정하거나 이용하는 비율은 매우 낮다. 왜일까? 단순히 관심이 없어서일까? 행동경제학은 이 회피와 망설임의 배경에 깊은 심리적 요인이 작동하고 있음을 설명해준다.

행동경제학적으로 본 디지털 유산관리의 불안심리의 구조

죽음과 마주하지 않으려는 심리

  디지털 유산 관리 서비스를 시작하려면 먼저 한 가지를 전제로 해야 한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전제는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큰 저항을 만든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계획은 세울 수 있어도,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를 행동경제학에서는 회피 편향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이 예상되는 주제를 가능한 한 멀리하려는 심리를 갖고 있다. 이로 인해 죽음과 관련된 선택은 항상 미뤄진다. 지금 당장 급하지도 않고, 떠올리기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설령 정보가 있어도 클릭하지 않거나, 설정 페이지를 열어두고도 닫아버리는 행동이 자주 나타난다.

'아직은 아닐 것'이라는 낙관적 착각

  사람들은 자신의 생애에 있어 죽음은 '아직 멀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행동경제학은 이를 낙관 편향이라 설명한다. 실제 통계나 확률과는 무관하게, 사람은 자신에게 부정적인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다. 예컨대 같은 연령대의 다른 사람에게는 사고나 질병이 닥칠 수 있지만, 나는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생긴다. 이러한 심리는 디지털 유산 관리 같은 준비 행위를 미루게 만든다. 아직은 필요 없을 것 같고, 지금 하지 않아도 큰일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문제가 생기고 나면, 남겨진 가족이나 지인들이 디지털 흔적을 정리하지 못해 고통을 겪는 사례도 많다.

데이터도 소유물이라는 착각

  디지털 유산을 관리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계정, 클라우드, 메시지, 사진 등을 누군가에게 넘긴다는 의미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정보들을 매우 개인적인 자산으로 여기고, 타인의 접근을 극도로 꺼린다. 이건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소유 효과와 관련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실제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거나 포기하는 데에 심리적 저항을 느낀다. 내가 찍은 사진, 내가 쓴 메일, 내가 저장한 메모들은 내 일부처럼 느껴지며, 심지어 사후에도 누군가가 그걸 들여다보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여길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디지털 유산을 ‘관리하는 것’보다는 ‘감추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

정보가 많을수록 더 멀어진다

  디지털 유산 관리에 대해 막상 알아보면 생각보다 복잡하다. 각 플랫폼마다 방식이 다르고, 조건도 다양하다. 어떤 서비스는 사망증명서를 요구하고, 어떤 곳은 생전에 설정해야 한다. 이처럼 정보가 지나치게 많고 구조가 복잡할수록 사람은 선택을 미루게 된다. 이는 과부하 회피 효과 때문이다. 선택지가 많거나, 내용이 어렵거나, 비교가 쉽지 않으면 인간의 뇌는 결정을 내리는 대신 ‘보류’를 선택하게 된다. 디지털 유산 관리도 그런 선택 중 하나다. 사용자는 '좀 더 알아보고 나중에 하자'는 생각을 반복하며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내 정보는 내가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

  사람들은 자신의 데이터나 계정을 스스로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를 행동경제학에서는 통제의 환상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클라우드에 올라간 사진이나 영상도 ‘내가 삭제하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망 이후 계정에 접근할 수 없게 되면, 해당 플랫폼에 접근 권한을 요청하거나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 더 심각한 경우, 사진이나 기록이 그대로 서버에 남지만 아무도 접근하지 못한 채 폐쇄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지금은 문제없다고 생각하며, 대비의 필요성을 과소평가한다.

‘기술로 해결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어떤 문제든 언젠가는 기술이 알아서 해결해줄 거라고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디지털 유산처럼 새로운 문제에 대해서는 이런 태도가 두드러진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를 대리 기대 효과라고 부른다. 사용자는 스스로 행동하기보다는 플랫폼이 자동으로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몇몇 기업은 사망 후 계정을 자동 폐쇄하거나 유족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기능을 탑재했지만, 이 역시 생전에 설정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기술이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는 기대는 오히려 개인의 행동을 늦추는 역효과를 낳는다.

남들 눈치와 감정의 간섭

  디지털 유산 관리는 철저히 개인적인 결정이지만, 실제로는 주변 사람의 시선도 영향을 미친다. 누군가 디지털 유언장을 작성했다거나, 클라우드 사진을 자녀에게 넘겨주는 설정을 했다고 말하면 일부는 지나치게 이른 준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는 사회적 규범 효과로 볼 수 있다. 아직 사회 전체적으로 디지털 유산 관리가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제적 행동이 도리어 이상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감정적 간섭은 합리적인 결정을 미루게 만든다. 당사자도 "지금 이걸 설정하는 게 너무 이른 건 아닐까?"라는 의심을 갖게 된다.

우리는 결국 선택을 미루고 있다

  디지털 유산은 분명히 중요한 문제다. 누구든 사고나 질병,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세상을 떠날 수 있고, 그 이후 남겨진 데이터들은 개인의 흔적일 뿐 아니라 가족에게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문제를 미루고, 외면하고, 나중으로 넘긴다. 이는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에 가까운 심리적 방어 기제가 작용하는 결과다. 죽음을 떠올리는 불편함, 정보 과부하, 통제에 대한 착각, 감정 회피 성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디지털 유산 관리 서비스는 존재하지만 실제 사용되지 않는다.

준비하지 않으면 남겨진 이들이 고통받는다

  디지털 유산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매우 현실적인 자산이다. 그것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감정의 기록이고, 관계의 흔적이며, 정보의 집합이다. 내가 죽은 뒤 그 정보에 접근할 수 없다면, 남겨진 가족은 소통의 단서를 잃게 된다. 특히 재산 정보, 가족사진, 장례와 관련된 메모 같은 것들이 아무런 정리 없이 사라질 경우 혼란은 더욱 커진다. 이제는 생전에 선택하고 준비해야 하는 문제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디지털 시대의 죽음은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가 남는 것이다. 그 데이터를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하지 않는다면, 타인에게 불편과 혼란을 전가하게 되는 셈이다.

진짜 내 삶을 통제하는 것은 사전 준비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런 특성을 이해함으로써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디지털 유산 관리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왜 이 주제를 꺼리는지, 무엇이 결정을 늦추는지 알게 되면 오히려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내 삶을 더욱 책임감 있게 통제하는 행위다. 디지털 유산 관리 서비스는 단지 기능이 아니라, 삶을 정리하고 남은 사람들에게 배려를 전하는 도구다. 필요한 건 정보가 아니라, 단 한 번의 클릭을 실행하는 용기다.